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카다 가쓰야 (문단 편집) === 정치 입문 후 === [[1990년]]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39회 중원선]]에서 자치대신 겸 국가공안위원장을 역임한 야마모토 유키오의 후계자로 (구) 미에현 제1구에 출마해 4등을 기록했지만 결국 당선했다.[* 중선거구제 시절이었고, (구) 미에 1구의 의원 정수가 5석이라서 가능했다.] [[자유민주당(일본)|자민당]]에서는 원래 [[다케시타 노보루]]의 [[헤이세이 연구회|경세회]]에 속해있었으나 [[하타 쓰토무]]의 개혁포럼21로 이동했으며, 이후 "한 나라의 총리대신 자리가 정치자금을 얼마나 잘 모으는가로 결정되선 안된다."[* 다케시타 노보루는 정치자금 모으기의 진수를 보여준 정치인이었고 결국 [[리크루트 사건]]으로 퇴진했다.]라는 말을 남기고 1993년 자민당을 탈당하여 [[신생당]] 창당에 참여했다. 이후 [[신진당]]에 참여하였으나 [[오자와 이치로]]가 신진당을 해산하면서 카노 미치히코 전 농림수산대신을 따라 국민의 목소리(정무조사회장), [[민정당(일본)|민정당]](정책조사회장)을 거쳐 민주당에 참여했다. 2002년, 제5회 당대표 선거에서 [[간 나오토]]에게 패해 간사장에 취임한다. 이후 2004년, 제6,7회 민주당 대표에 취임하고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자민당을 한 석 앞서면서 주목받지만 예상보다 빠른 중의원 해산(우정 해산)으로 인해 실시된 총선에서 참패하면서 대표직에서 물러난다. 2006년, 민주당 개조인사로 부대표에 선출된다. 2009년 젊은 의원들을 규합하며 다시 대표선거에 출마하지만 [[하토야마 유키오]]에게 밀렸다. 이 때 선거 직전 민주당 인사들이 오카다에게 해준 말이 미국에는 오바마, 일본에는 오카다가 있다고 해주기도 했다. 패배 직후 간사장에 취임했다. 이후 민주당 정권에서 외무대신, 간사장, 부총리 등을 거치다가 민주당 정권이 무너지면서 야당 인사가 되었다. 외무대신 시절 식민지 지배에 대해 다시 사죄하고 식민지배의 '''강제성'''과 '''폭력성'''을 인정하는 [[간 담화]]에 관여했다. 2014년 [[가이에다 반리]]의 대표 사임으로 인하여 대표 대행이 되었고 2015년 다시 민주당 대표선거에 출마하여 [[호소노 고시]]를 제치고 마지막 민주당 당대표로 당선되었다. 야당 재편파로 [[유신당]]과 통합을 주장하는 호소노 후보에 비해 야당 재편에 신중하고, 경험 많은 당대표가 이끌어 선명한 야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오카다의 주장이 높이 평가받았다. 그러나 미에현지사 선거에서 민주당이 독자 후보를 옹립하는 것을 포기하고 보수 성향의 [[스즈키 에이케이]] 후보가 당선되는 등 자신의 지역구에서 영향력이 감소하고 있다는 평도 받았다. 2016년, 민주당이 [[유신당]], [[개혁결집회]](일부)와 합당해서 [[민진당(일본)|민진당]]이 창당되었고, 첫 대표로 지명되었다. 임기는 2016년 9월 30일까지이다. 2016년 [[제24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자신의 중의원 지역구가 있는 곳이자 정치 기반인 미에현에서 민진당 후보가 낙선하면 다음 당대표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배수진]]을 쳤다. 미에현은 이번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과 민진당의 명운을 건 격전지인 총 32곳의 1인 선거구 중 하나였는데, 선거 결과 민진당에서 출마한 미에현 후보가 끝내 겨우 당선되어 그나마 한숨 돌리게 되었다. 당시 아베 신조와 오카다 가쓰야의 대결이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치열한 접전을 벌였던 곳이었다. 하지만 개헌선인 2/3을 [[자유민주당(일본)|자민당]], [[공명당]], [[오사카 유신회]] 등 개헌세력이 차지하는 걸 막지 못해, 이에 오카다 대표에 대한 책임론이 부상하였고, 결국 7월 30일 불출마를 선언했다. 8월 2일 양원의원총회에서 9월 2일 대표 선거를 고시하고, 9월 15일 투표와 개표를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선거 결과 [[렌호(정치인)|렌호]] 대표대행이 차기대표로 선출되었다. 이후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민진당 당적을 유지한 채 무소속으로 출마하게 되었다. 원래는 [[희망의 당(2017년)|희망의 당]]에서 출마하려 했으나 거부당했고 [[입헌민주당(2017년)|입헌민주당]]과는 성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무소속으로 출마하게 되었다. 투표 결과, 64.3%(147,255표)를 획득하며 압도적인 차이로 자유민주당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10선째 이후 한동안 민진당 출신 무소속 회파를 유지하면서 호헌 연대에 참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